조회수 41 작성자 아이**02 등록일 2026-04-03 좋아요 0
도서명대지
저자펄 S.벅
출판사소담출판사
1983년, 갑작스러운 중도 실명은 소년이었던 나의 세상을 한순간에 정지시켰습니다. 대전에 있는 맹학교로 전학을 오게 된 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정보로부터의 고립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읽어주는 스마트폰도, 풍성한 점자 도서관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나 겨우 몇 군데 있던 점자 도서관은 멀기만 했고, 녹음도서를 빌리고 반납하는 과정은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에게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았습니다.
그 갈증을 채워준 것은 당시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침 조회와 저녁 종례 시간마다 우리를 위해 책 한 권을 선정해 딱 10분씩 읽어주셨습니다. 그 10분은 정보의 불모지에서 살아가던 내게 유일하게 허락된 ‘상상의 창’이었습니다. 특히 남자 담임 선생님이 인물마다 목소리를 바꿔가며 들려주신 성대모사 낭독은, 눈앞의 어둠을 걷어내고 나를 소설 속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목소리를 통해 처음 만난 작품이 바로 펄 벅의 『대지』였습니다. 중국 근대의 격동기, 빈농이었던 왕룽이 오란과 함께 땅을 일구며 대지주가 되기까지의 서사는 조그만 맹학교 교실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특히 대기근 속에서 하늘을 뒤덮은 메뚜기 떼가 습격하던 장면은 지금도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수천만 마리의 날갯짓 소리와 함께 모든 초록을 집어삼키던 그 처절한 생존의 현장. 그 시련 속에서도 묵묵히 땅을 파헤치며 가정을 지켜내려 했던 아내 오란의 우직한 삶은 어린 내 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울림을 주었습니다.
왕룽에게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생존의 근거이자 신앙이었습니다. 땅은 정직했습니다. 땀 흘린 만큼 보답하되, 인간이 교만해질 때는 가차 없이 시련을 주며 겸손을 가르쳤습니다. 가난할 때 단단했던 가족 공동체가 물질적 풍요와 함께 서서히 균열하고, 헌신적이었던 오란을 외면하며 화려한 생활에 젖어드는 왕룽의 모습은 부라는 이름 뒤에 숨은 인간 정신의 황폐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평생을 맹학교 컴퓨터 담당 교사로 일하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IT 교육과 보급에 매진해 왔습니다. 기술이 시각장애인의 삶을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지 누구보다 굳게 믿어왔고, 관리자가 된 지금도 그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환갑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다시금 『대지』를 떠올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스마트폰과 AI가 보편화된 오늘날, 우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해졌지만 정작 “행복하냐”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지 못합니다. 인공지능과 가상 세계의 숫자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펄 벅은 경고합니다. 인간은 결국 자연의 일부이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물리적 토대와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망각할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워지는지를 말입니다.
오늘날 실로암e도서관 아이프리는 저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 중 하나입니다. 터치 몇 번이면 수만 권의 책을 꺼내 볼 수 있는 이 ‘마법 같은 도구’는 정보접근권이 곧 인권임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TTS의 음성 목소리 너머로, 1983년 그 교실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던 담임 선생님의 투박하고 낭낭한 목소리가 그리워지곤 합니다. 그 목소리에는 기술이 채 다 담지 못하는 ‘사람의 온기’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쪼록 아이프리 도서관이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창구를 넘어, 우리 시각장애인들이 삶을 바라보는 올바른 기준을 수립하고 ‘인간다움’의 본질을 찾아가는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왕룽이 평생을 바쳐 지켰던 그 흙의 정직함처럼, 이곳에서 흐르는 지식의 강물이 우리 모두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단단하게 적셔주길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